함께 손잡고, 다시 뜨겁게! 멋을 아는 도시, 대전 중구
이곳이 벌판이었던 만큼 벌말에서 전해오는 민속으로서"버드내 보싸움놀이"와 "버드내두레"가 있어 1996년과1997년에 시행한 대전광역시 민속경연대회가 각 출현한 바있는데, 먼저 보싸움 놀이에 대하여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洑)란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시냇물에 둑을 쌓고 물을 가두어 두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나 저수지나 방죽과 같이 물길을 완전히 차단해서 가두어 두는 것이 아니라 물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일부는 밑으로 흘려보내고 일부는 수로(水路)를 길게 내어 논으로 물을 대주는 것이 보의 핵심적인 기능입니다.
요컨대 보는 우리민족이 물을 어떻게 활용했으며, 또 물에 얽힌 여러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슬기와 재치가 녹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농경의 역사와 그 시원(始原)을 같이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이야말로 농경에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조선 중기 이앙법의 보급 및 두레노동의 확산과 함께 보는 수도작 농경에 없어서는 안될 긴요한 방편으로서 폭넓게 조성되었습니다. 따라서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는 마을이면 어디서나 보가 만들어졌지만, 큰 시냇가를 끼고 있는 마을에서는 더욱 보의 발달을 촉진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냇물에 여러 마을이 의존해야하는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합니다.
버드내가 자리한 유등천 주변에도 여러 개의 보가 만들어져 드넓은 한밭벌을 비옥한 곡창지대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버드내 보싸움 놀이가 전승되고 있는 유등천 주변만해도 안영동 아들바위 밑 자리한 성산보, 버드내 주민들의젖줄인 원대보(물문보), 안영리 후보, 복수보, 도마보, 용두보 등이 자리해서 과거 이 지역이 벼농사를 위주로한 곡창지대였음을 여실히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버드내 보싸움놀이는 결국 농경이 필수조건인 보의 축조와 그것을 둘러싼 주민들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민속놀이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보싸움 놀이가 언제부터 유래한 것인지는 단언할 수없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벼농사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치수의 문제는 우리 민족이 정착 생활을 시작한 고대 농경사회 아래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까닭입니다.
아무튼 유구한시간을 두고 전승되어 온 버드내 보싸움 놀이는 1960년대 이후 유등천 주변의 경작지가 대부분 시가지로 탈바꿈하면서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버드내 보싸움 놀이의 구성은 1) 원대보를 막고 수로를 개보수하는 보막기 2) 농사의 풍년을 빌고 보가 무너지지 않기를 비는 보제 3) 작인들(소작인들)간에 벌어지는 물꼬싸움 4) 보와 보, 즉 마을과 마을간에 벌이는 보싸움 5) 보싸움의 갈등을 해소하고 두 마을이 화해의 자리를 갖는 화합의 장으로 구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