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손잡고, 다시 뜨겁게! 멋을 아는 도시, 대전 중구
유등천 지류 정생천을 따라 상류로 가다보면 보문산과 만인산 사이 깊은 산골 아늑한 터에 닿는다. 대전시 중구 어남동 도리미 마을 단재신채호선생생가지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서 도로를 벗어나 다리를 건너니 길가에 자리 잡고 있는 남향의 팔작집에 눈길이 멈춘다. 그 곁에 자라고 있는 은행나무가 예사로운 집이 아님을 암시하지만 가난한 선비의 아들로 태어나 궁핍한 생활을 했다던 선생의 유년시절과 어울리지 않는다. 내쳐 더 걸으면 길 건너에 위치한 선생의 유허비가 반긴다.
‘독립유공자 단재신채호선생유허비‘라 적혀있는 유허비. 유허비 옆 좁은 길로 접어들면 생가지로 이어진다.
이 땅에 전해지는 신채호선생의 자취를 알려주는 유허비가 귀부와 비신, 용두를 제대로 갖추고 있으니 생경스럽지만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후손들의 정성이려니.. 유허비를 어루만진다. 유허비를 뒤로하고 생가지 앞을 흐르는 도랑을 건너고자 하니 생가지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생가지를 굽어보고 서있는 단재 선생의 동상과 잘 정돈된 넓은 마당.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생가지에 복원된 생가에 다다를 수 있다.
도랑을 건너면 잔디광장 언저리에 단재 선생의 동상과 생가가 조성되어 있다.
현재 복원된 생가는 단재 선생과 삼종간인 신이호 여사의 증언에 의하는 등 고증을 거쳐 지은 집으로 ‘ㄱ‘자 초가집과 창고채가 딸려있다.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는 초가집은 안방과 건넌방을 내당공간으로 하고 동쪽으로 툇마루를 내고 왼쪽에 들인 앞면 2칸 옆면 2칸의 날개집은 따로 남쪽으로 툇마루를 내어 별도의 공간으로 구분하고 있다. 내외가 유별한 당시의 정서를 고려하면 사랑채와 안채를 한 몸으로 들인 가난한 선비의 고민이 묻어나는 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전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 그리고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인 단재 선생을 기리고자 1992년부터 1999년까지 대전시가 성역화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는 생가지의 확보는 꼭 필요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생가지는 안동권씨 사포공파 종중 땅이어서 부지확보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신이호 여사의 아들 사포공 6세손 권용민씨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단재 선생 성역화 사업에 종중으로부터 부지를 헌성 받는다.
돌담장 사이 생가로 들어가는 입구에 생가유허비와 헌성감사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안동권씨 사포공파 종중에 감사하는 대전시의 마음 변함없이 이곳을 찾는 방문객에게 전하고 있다. 작은 규모이지만 요모조모 쓰임새 있게 지어진 생가 안방의 여인은 선생의 어머니, 사랑채의 책 읽는 소년은 8살까지 이곳에서 살았던 선생의 유년기를 재현해놓은 것.
그 옆방에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항일투사들의 손으로 만들어져 형무소를 축조했던 빨간벽돌이 전시되어 있다. 생가에 전시되고 있는 벽돌은 선열들이 이 벽돌로 지어진 형무소에서 감금․혹사 당했던 역사적 아이러니를 통해 독립정신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서울시가 형무소자리에 서대문독립공원 조성하면서 헐어낸 벽돌의 일부를 기념으로 제작한 것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의 생가이다.
신채호는 한말 일제시대에 역사가, 언론인,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으며 26세가 되던 해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황성신문 기자가 되었다. 1905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그 이듬해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을 써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였다.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 4월 망명길에 올라 블라디보스톡에서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위임통치에 반대하였다. 1923년 의열단의 이념과 운동방향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은 항일민족 운동사상 가장 강건하고 웅장하면서 정교하게 독립운동의 이론과 방향을 제시한 문서로 손꼽힌다. 선생은 1928년 대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1992년 여름, 선생의 생가를 발굴 조사하고 주민들의 고증을 토대로 선생의 생가를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