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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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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보물

대전지구 전적비

  1950년 7월 5일 오산전투 이후 경부축선을 따라 지연전을 전개하여 오던 미 제24사단이 대전에서 북한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방어전을 전개하면서 3.5' 로켓포를 최초로 사용하여 북한군 전차를 파괴하는 등 성과를 올렸다. 이때 24사단을 진두지휘하던 “딘”장군이 실종되는 비운을 겪었다. 본 전투에서 용감히 싸우다 산화한 영령들을 추모하고 혈맹의 우의를 길이 전하기 위하여 1981년 12월 이 전적비를 건립하였다.

기념비 정보

  • 위치 : 대전 중구 대사동 산 3-71 보문산 야외음악당
  • 건립일자 : 1981.12.21.
  • 면적,높이 : 경역면적 1,070평, 기단높이 0.92m, 비높이 12
  • 관리기관 : 공원관리사무소
  • 참고문헌 : 전적기념물편람집(국방군사연구소)

비문 내용

보라. 이곳은 유엔군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먼 이국땅에 와서 유엔의 깃발을 나부끼며 적과 맞서 싸운 곳. 그들은 가고 없으나 그들의 공적은 이곳에 찬연히 빛나리라.

1950년 6.25전쟁을 일으킨 붉은 무리들은 밀물처럼 밀려와 이 아름다운 강토를 붉게 물들이었다. 이때 평화의 사도 미 제24사단은 한국을 지키기 위하여 최초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 미 제24사단을 지휘하는 윌리암 에프 딘(William F. Dean) 소장은 대전에 작전지휘소를 정하고 미 제8군의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 까지 북한군의 남침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먼저 평택 안성을 방어하다가 여유치못하면 천안 부근에 있는 차령산맥에서 적을 막아내고 그래도 여유치 못하면 금강에서 지연작전을 펴기로 했다. 그러나 죽미령에서 미 제24사단의 예하부대인 '스미스'부대를 격파한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성난 파도처럼 밀려와 7월 16일에는 금강방어선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미 제24사단은 마침내 최후의 방어선인 대전에 진을 치고 적군을 물리칠 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이를 본 북한군은 '대전만 점령하면 한국군과 유엔군은 붕괴된다.' 하고 호언하면서 그들의 최정예부대에 제105전차사단을 앞세우고 보병 제3사단과 제4사단으로 하여금 대전을 삼면에서 포위 공격함으로써 아군과 적군은 혈전을 벌이게 되었다. 특히 미 제24사단장인 '딘'소장은 부대의 진두에 서서 유엔군을 지휘하다가 북한군의 전차가 대전시내에 침입해 오자 3.5인치 로켓포를 발사하여 북한군의 전차 한 대를 직접 파괴함으로써 떨어졌던 아군의 사기를 드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우세한 북한군들을 막을 길이 없었다. 미 제24사단은 7월 20일 마침내 대전을 내어놓고 낙동강으로 물러가서 그곳에서 재기를 다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말미암아 아군이 전열을 가다듬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2일간의 전투에서 미 제24사단은 북한군 수백 명을 사살하고 전차 15대와 대포 21문을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반면에 미 제24사단은 미국 남북전쟁이래 가장 많은 고급장교를 잃었으며, '딘' 소장은 포위망을 뚫고 금산쪽으로 남하하다가 실종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낙동강에서 방어선을 치고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은 일제히 총반격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러자 미 제24사단은 지난날 쓰라린 패배를 설욕하려고 최선봉에 서서 돌진하여 대전에 진을 치고 있던 북한군을 분쇄하고 9월 28일 아름다운 대전을 탈환하게 되어 자유의 물결에 다시 한밭 들이 넘치니 산천은 만세를 부르는 듯하였다. 이제 포성이 멎고 비둘기가 날고 들꽃이 아름답게 피는 이 언덕에 우리는 미 제24사단의 전적과 혈맹의 우의를 길이 전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우나니 미 제24사단! 그 이름 천추에 빛나리라.

참고사항

대전 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소백산맥과 금강 선에서 지연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미 제24사단이 제105전차사단으로 증강된 북한군 2개 사단(제3, 제4사단)과 맞서 금강 선으로부터 대전 지역가지의 사이에서 치른 지연전이다.

북한군은 미 제24사단(사단장 딘 소장)을 압력하고 대전을 포위공격하기 위하여 제3사단은 정면에서, 제4사단은 대전 서쪽인 논산방면에서 포위, 압축하고 양 사단은 일부 병력으로 경부가도와 금산가도를 차단하여 미 제24사단을 완전히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처음에 북한군은 이 대전 전투를 위하여 제2사단 증원투입하려 하였으나 국군 수도사단의 강력한 저항으로 불가능하였다.

미 제24사단은 대전비행장에 사단지휘소를 설치하고 대평리와 공주 지역에 각각 1개 연대의 병력을 배치하여 금강에 연한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북한군 제4사단은 7월 18일부터 논산에서 대전 남쪽으로 우회하기 시작하였다.

7월 19일 북한군의 대전 총공격은 전투기의 폭격으로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압축하여 침투한 북한군은 7월 20일이 되기 전에 완전히 미 제24사단을 포위하였다. 딘 사단장은 20일 미명에 포위상황을 인지하고 야간을 기하여 철수하기로 하고 주간에 대전시에서의 시가전을 감행하였다.

이때 한국전쟁에서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하는 3.5인치 로켓포를 딘 사단장이 직접 적전차에 사격하여 파괴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러나 딘 사단장은 북한군이 금산가도에서부터 북상함에 따라 곧 시가전을 중단하고 7월 20일 오후 3시 30분부터 사단을 영동 지역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이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대전을 사수한 사단장 딘 소장이 실종되어 북한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약 30%의 병력손실과 1개 사단 분의 장비를 상실하였다. 이 전투를 계기로 미군은 북한군의 전투력을 재평가하여 새로운 대비책을 강구하게 되었으며, 북한군은 국군과 유엔군이 유기적인 전선을 형성하기 전에 대구 지역으로 남하하기 위하여 경부 축선 상으로 그들의 전투력을 집중하게 되었다.

기념비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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